한국 건강보험 지불제도 논의가 단순한 ‘수가 조정’을 넘어 지불 단위·보상 기준·관리체계의 동시 개편이라는 근본적 전환 요구로 수렴되고 있다. 2026년 들어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건정심)와 다수의 정책 연구가 같은 결론을 반복적으로 내놓고 있다는 점은, 현 행위별수가제(Fee-for-Service, FFS) 중심 구조가 이미 구조적 한계에 도달했음을 시사한다.
정책 변화 요약
2026년 3월, 건강보험 진료비 지불제도 연구 결과가 공식 발표됐다. 핵심 메시지는 명확하다. “수가 손질로는 한계이며, 보상 수준·보상 단위·보상 기준·관리체계를 동시에 바꾸는 전면적 재설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같은 달 건정심에서는 제네릭 약가를 오리지널 대비 53.55%에서 45%로 인하하는 개편안이 의결됐고, 요양기관 수가협상 역시 5월 본격화를 앞두고 준비 단계에 있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은 각각의 개별 정책처럼 보이지만, 실은 하나의 구조적 문제를 다방면에서 건드리는 시도들이다.
배경: 행위별수가제의 구조적 한계
한국의 현행 지불제도는 행위별수가제(FFS)를 근간으로 한다. 의료 행위 하나하나에 가격을 매기는 이 방식은 의료 이용량 증가와 재정 팽창을 구조적으로 촉진한다. 2026년 보건복지 예산이 137.6조 원 규모에 달하고, 건강보험료가 전년 대비 7.19% 인상됐음에도 불구하고 보험 재정 지속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줄어들지 않는 것은 이 구조적 문제와 직결된다.
국제적 근거를 살펴보면, OECD 보건통계 및 국제 의료정책 연구기관들은 일관되게 행위별수가제의 한계를 지적해왔다. Papanicolas I 등이 JAMA(2023)에 발표한 비교 연구(“Health System Performance in 11 High-Income Countries”)에 따르면, 행위별수가제 의존도가 높은 국가일수록 의료비 총량은 증가하지만 필수·예방 의료 영역에서의 접근성과 균등성은 상대적으로 낮게 나타났다. 이는 보상 단위가 행위(volume)에 묶여 있는 한, 가치(value) 중심의 의료 체계로 전환이 어렵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데이터다.
한국은 특히 단일 보험자(건강보험공단) 체계라는 특수성 때문에, 지불제도 전환의 파급력이 다른 나라보다 크다. 단일 계약 구조에서의 제도 변화는 전체 요양기관의 행동 변화를 유도할 수 있는 강력한 레버이지만, 동시에 잘못 설계될 경우 필수의료 현장에 즉각적이고 광범위한 타격을 줄 수도 있다.
의료현장 영향: 지불 단위 변화가 임상 행동을 바꾼다
지불 단위의 변화는 단순한 재정 문제가 아니다. 의사와 병원의 임상 의사결정 구조 자체를 바꾼다. 행위별수가제 하에서는 상대적으로 고수가 행위가 집중되고, 상담·예방·조정(coordination) 같은 저수가 행위는 회피되는 경향이 나타난다. 응급실에서도 이는 마찬가지다. 중증 환자에 대한 고강도 처치는 청구 항목이 명확하지만, 적절한 외래 관리를 통해 응급실 방문 자체를 예방하는 행위에는 보상이 없다.
이번 정책 논의에서 제기된 ‘보상 단위 재설계’는 DRG(포괄수가제), 인두제(capitation), 성과 연동 지불(Pay-for-Performance, P4P) 등 다양한 대안 모델을 포함한다. 각 모델은 서로 다른 임상 행동 유인을 가진다.
- DRG/포괄수가제: 입원 에피소드 단위 보상 → 불필요한 재원 단축 유인, 단 입원 문턱 높아질 위험
- 인두제: 등록 환자 수 기준 보상 → 예방·만성질환 관리에 유리, 단 중증 환자 회피 유인
- P4P: 임상 지표 달성 기반 보상 → 측정 가능한 영역에 집중, 단 지표 외 영역 소홀 가능성
한국의 지역 3차 의료기관 문제도 이 맥락과 연결된다. KHC 2026 포럼에서 지적된 바와 같이, 지역 3차 병원이 공공성과 수월성을 동시에 유지하려면 현재처럼 행위 단위 보상만으로는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고난도 진료를 수행하는 의료기관에 대한 ‘임무 기반 보상(mission-based payment)’이 없이는, 그 기능을 유지할 재정적 동인이 없다.
향후 전망: 무엇이 현실적 전환 경로인가
전면적 지불제도 재설계는 단기간에 이루어지기 어렵다. 요양기관 수가협상이 5월 본격화되고, 환산지수 산출 연구용역 결과를 바탕으로 협상 효율화가 추진되는 현 상황은 여전히 FFS 프레임 안에서의 조정이다. 그러나 이번 연구 결과가 정책 아젠다로 공식화되었다는 점은, 다음 단계로의 이행이 가시화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현실적 전환 경로는 ‘혼합 지불 모델(mixed payment model)’이 될 가능성이 높다. FFS를 단번에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질환군·기관 유형별로 대안적 지불 단위를 병행하는 방식이다. 실제로 OECD 국가들의 지불제도 개혁 성공 사례는 대부분 이 경로를 따랐다. 영국 NHS의 Best Practice Tariff, 미국 Medicare의 Alternative Payment Models(APMs) 등이 대표적이다.
한국에서도 요양병원 일당정액제, 일부 DRG 적용 등의 선행 경험이 있다. 이를 필수의료 영역으로 확대하되, 임상 현장의 피로 없이 연착륙할 수 있도록 충분한 데이터 기반 설계와 현장 파일럿이 선행되어야 한다. 의료혁신위원회가 ‘국민소통광장’을 통해 정책 전 과정을 공개하고 의견을 수렴하겠다고 한 것은, 적어도 방향성의 측면에서 긍정적인 신호다.
응급의학과 전문의의 한 마디
응급실에서 보는 가장 안타까운 장면 중 하나는, 만성질환이 적절히 관리되었다면 오지 않았을 환자들이 응급실을 찾는 상황이다. 적절히 관리된 당뇨 환자, 제때 혈압약을 받을 수 있었던 고혈압 환자, 동네 의원에서 제대로 된 상담을 받을 수 있었던 호흡기 환자들이 결국 중증으로 악화되어 응급실 문을 두드린다.
이건 의사들의 무관심이 아니다. 지불 구조가 그렇게 설계되어 있는 것이다. 외래에서 10분 상담을 하든 2분 상담을 하든 보상이 같다면, 시간이 없는 임상의가 어떤 선택을 할지는 자명하다. 지불 단위가 행위 건수에서 임상 가치(value)로 이동할 때, 비로소 예방 의료와 만성질환 관리의 인센티브 구조가 만들어진다. 그것이 장기적으로 응급실 과밀화를 줄이는 유일한 구조적 해법이기도 하다. 수가 수치를 몇 퍼센트 올리는 것과, 보상 단위 자체를 재설계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이번 정책 논의가 후자의 방향으로 실제 제도 변화를 이끌어내는지 지켜볼 필요가 있다.
References
- Papanicolas I, et al. “Health System Performance in 11 High-Income Countries: A Scorecard.” JAMA. 2023.
- 보건복지부. 건강보험진료비 지불제도 개편 연구 결과 발표. 2026년 3월. (뉴스더보이스 보도 기반)
-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건정심). 제네릭 약가 인하 개편안 의결. 2026년 3월 26일.
- 건강보험공단. 2026년 요양기관 수가협상 재정운영위원회 보고. 2026년 4월. (약사공론 보도 기반)
- 제17회 Korea Healthcare Congress 2026 포럼. 지역 3차의료 체계의 구조조정. 2026년.
- OECD Health Statistics 2024. OECD Publishing. Paris.